Critic

나타남과 사라짐, 그 사이에서 멈춤

구본아 개인전 : 잔해 Wreck scenery

안 소 연 I 미술비평가

THEETH OF TIME 한지 꼴라주 위에 먹과 채색, 금분, 은분((Ink and color on korean paper collage, silver and gold powder), 각 160x132x5cm, 2019

THEETH OF TIME 한지 꼴라주 위에 먹과 채색, 금분, 은분((Ink and color on korean paper collage, silver and gold powder), 112x112cm, 2019

WRECK SCENERY 9 한지 꼴라쥬 위에 먹과 채색, 금분, 은분(Ink and color on korean paper collage,silver and gold powder), 117x91cm, 2020

THEETH OF TIME 한지 꼴라주 위에 먹과 채색, 금분, 은분((Ink and color on korean paper collage, silver and gold powder), 100x140cm, 2019

WRECK SCENERY 12 한지 꼴라쥬 위에 먹과 채색, 금분, 은분(Ink and color on korean paper collage,silver and gold powder), 117x182cm, 2020

시간의 이빨 - 좌유(坐游) 나무, 천 외, 150x150x80cm, 2019

1. 시간의 형상 


그가 그린 풍경은 “멈춤”의 상태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그가 그린 것은 오브제처럼 멈춰 있는 풍경이며, 그것의 현존하는 상태를 환기시킨다. 구본아의 ⟪잔해풍경⟫에서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운동성이 암시되어 있지만, 그 둘을 가늠케 하는 것은 이 멈춤이 자아내는 부동의 에너지다. 그 힘의 근원을, 나타남과 사라짐, 생성과 소멸, 그 둘의 왕복 운동이 그려내는 포물선 어딘가에서 돌연 “멈춰버린 움직임”의 형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그러한 부동의 정지 상태는 현실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이지만, 나타났다 사라지고 또 다시 나타나기를 끝없이 반복하는 마술 같은 현실에서,어느 한 순간어떤 한 자리-시간과 장소는 어떤 경우 같은 것을 지시하기도 하니까-에 오래된 자국처럼 계속해서 들러붙어버린 시간의 형상 같은 것으로 가늠된다. 


   이때, 시간의 형상은“불가능한 것의 현존”으로서 시간이자 장소인 것이며, 그 둘이 교차할 때 마치 무지개처럼 떠올라 그 풍경 너머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알아차림으로 우리를 들뜨게 한다.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것을 반드시 찾아내려는 시각적 충동이 아니라,보이지 않음으로 존재하는 시각과 사유 사이의 변증법적 역설에 대해 상상하며 유희하는 것에 가깝다. 그것(시간의 형상)을 본다는 것(시각)은 불가능하기에, 단지 그것을 알아챈다(사유)는 것으로 말해 두는 게 낫겠다. 요컨대, “잔해풍경”으로 특정된 구본아의 그림은 실재하는 시간에 종속된 현실의 풍경이기 보다는 단지 시간의 형상 그 자체가 경험된 것으로, 인식과 사유의 주체로서의 그림 그리는 자가 미처 본 적 없는 혹은 도저히 볼 수 없는 세계의 풍경에 대해 마음 속에 상상하며 어떤 형상을, 어떤 이미지로서의 형상을, 또 어떤 오브제 같은 형상을 출현시켜 눈 앞에 가져다 놓은 것이다. 그것의 크기와 촉감과 물성과 서사마저, 어디까지나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현실 세계의 그것 자체이기 보다는 현실 세계의 지지체가그 안에 화석처럼 뭉쳐 놓은 정체 모를 “흔적들”의 크기이며 촉감이며 물성이며 서사인 부동의 시간에 대한 추상적 감각을 일깨운다. 


   구본아의 ⟪잔해풍경⟫에서, 시간의 형상에 대한 목격을 증언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며 그리 억지스러운 일도 아니다. 이미 “잔해풍경”이라는 네 음절로 된 제목이, 그 기표가 의미에 가서 닿기도 전에 어떤 이미지로서 우리에게 시각적인 연상을 불러 일으키듯, (삶을 초과하는) 거대하고 초월적인 시간의 흐름과 그것의 소외가 가져온 멈춤과 그 멈춤의 상태가 시간을 공간으로 변환시켜 놓은 어떤 풍경으로 목격되는 것에 대해 말해준다. 따라서, 구본아가 말하는 “잔해풍경”은 일종의 비현실적인 부동의 시간에 대해 일깨우면서 동시에 그 풍경으로서의 형상에 대한 현전의 감각과 미학적 사유의 방식을 가늠케 한다. 


 2. 그 형상의 물성 


구본아의 <시간의 이빨 Teeth of Time>(2019)은 그가 2011년부터 시도해 온 그림 연작으로, 그에게서 생성된 시간의 형상에 대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 그가 말하는 시간의 형상은 “소멸”을 전제로 하는데, 이는 일련의 소멸이 불러오는 필연적인 “삶의 순환성”과 더불어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그 중립의 상태, 그것이 나타내는 부동의 평형 상태를 환기시킨다. 구본아는 부동의 평형 상태가 드러나는 임의의 “순간”에 대한 현전, 즉 그것의 갑작스러우면서도 경이로운 출현을 알아차림 가운데 경험함으로써, 그것의 시각적 표상을 단순한 (비현실적인) 유토피아적 상상으로만 해방시켜 놓지 않고 (현실적인)디스토피아적 허구성에 결박시켜 놓기도 꺼리지 않는다. 말하자면,이상향과 현실이 비밀스러운 통로로 맞닿아 있는 초현실적 상상의 시공간을 상상해도 좋다. “시간의 이빨”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을 때, 그것이 일으키는 시각적 상상력은 종말의 징후와 태초의 신비를 동시에 수행하는 마법 같은 “시간”의 역량이다. 이를테면,시간의 이빨이 함의하는 사실은 어떤 것을 수행하는 의인화된 시간의 역량이며, 그것은 시간의 몸통 안으로 진입한 무언가를 잘게 부숴 집어 삼켜버리는 소멸의 힘과 그 사라짐 혹은 죽음의 순간을 “무(無)”로 정의하지 않고 삶의 근원적인 “원형”으로 회복시켜 놓는 힘을 함께 상기시킨다. 때문에,구본아가 사유하는 시간은 나타남과 사라짐의 무한한 반복을 보여주는 궤도를 그리며 밤하늘에 떠 있는 서늘한 달빛처럼, 응시를 등지고 보이지 않는 움직임과 크기와 온도와 소리와 질감, 즉 그 형상의 물질성을 우리로 상상케 한다. 


   그가 쓴 글  「‘物(물)’과 나눈 대화”」(2004)를 보면, “무언의 사물과 말한다는 것, 즉 말없는 사물들에게 귀 기울이고 그림을 통해 인식의 통로를 여는 것이 이미지의 노예로부터 그림의 강박관념으로 벗어나는 길로,사물과 나누는 진정 순수한 대화를 통해 가능한 일”이라 말했다. 이는 그가 “시간성을 느끼게 해주는 낡은 사물들”에 대해 인식하는 태도를 드러내며,죽음처럼 멈춰버린 것 같은 사물들에서 역설적이게도 “여러 흔적과 형상들”을 발견하여 “내면에 생성되는 감정의 세계”와 만나는 합일(合一)을 말해준다. “物(물)과 나눈 대화”는 “죽음”, “소멸”, “침묵”, “부동”의 상태를 알리는 “낡은 사물” 혹은 “잔해”에 대한 구본아의 시각적 사유가 그 “낡은 사물(죽음/소멸/침묵/부동)” 로부터 촉발된, 그것이 만들어내는, 힘과 운동(의 현전)에 대한 경험으로 다시 전환되는 역동성을 담고있다. 말하자면,폐허와 잔해로 일컬어지는 낡은 사물들에서 시간의 흔적과 운동성을 사유하여, 차라리 더 이상 사물이기 보다는 물질이라 말하는 게 나을 만큼 제 형태 보다는 시간에 의해 사라진 잔해의 형상에서 새롭게 출현하는 어떤 물성을 강하게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물성의 출현이 형태의 소멸과 맞닿아 어떤 평형의 상태를 이루면서 마침내 멈추어 있는 하나의 오브제 같은 “잔해풍경”이라는 그림이 되었다. 


   재료에서,그는 한지를 쓰는데 있어 단순한 배접의 방식을 넘어 그가 “한지 콜라주”로 특정해 놓은 특유의 기법을 거쳐 종이의 두께와 층과 결이 촉발하는 양감뿐 아니라 한지 조각을 나란히 이어 붙여 얻어낸 평면의 질감을 한껏 강조해왔다. 또한 채색 재료로 먹과 물감에 금분 및 은분을 추가하여, 콜라주된 종이 지지체와 겨루며 완성된 형상은 더욱 선명하고 견고해 보인다. (2020)과 (2019)을 보면, 격자 모양으로 표면에 질감이 생긴 배경 위에 잔해풍경이 구축된 것인데, 이 배경의 질감과 풍경의 형상이 어떤 강한 압력에 의해 눌러 붙어 하나의 그림이자 오브제가 되어 버린 것 같은 인상이 강하다. 그런 탓에, 어떻게 보면 물성이 강한 자개 그림 같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실물을 가져다 붙인 압화 같기도 해서, 저 풍경이 자아내는 시간의 형상뿐 아니라 이 그림이 스스로 간직하고 있는 시간성이 형상을 가진 물질로 가늠되는 듯하다. (2020)과(2020)에서는 고서(古書)의 잔해로서 그림 속 형상이 지닌 촉각과 후각의 물성마저 극대화되어 나타나는데, 그것이 또한 여백으로서의 그림 배경을 물성을 지닌 오래된 사물(古文書)로 전환시키는 마술을 부려 그림의 시간에 대한 현전의 감각을 발휘한다. 


3. 그 물성의 아름다움 


구본아의 ⟪잔해풍경⟫에서 시간의 형상으로 나타난 형태의 변증법적인 구조는 ⟪폐허산수⟫(2009)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나, 그동안 과거와 미래,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 나타남과 사라짐의 이분법적 가치의 합일을 시각화 했다. 특히 그림의 대주제로서, “문명”과 “자연”의 변증법적 순환 구조를 시간의 형상으로 은유해 오면서, 그는 그것이 이루는 완전한 균형의 상태를 미학적 관점에서 이해한 것 같다. 이때, “완전한 균형의 상태”란 이상적인 합일을 뜻하기 보다는 소멸과 생성이 끝없이 서로를 욕망하면서 사라진 것 혹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현존을 공모하며, 역설적이게도 그것의 일체-사라짐과 나타남의 현존-에 대한 현전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구본아는 그것을 하나의 미학적 사건으로 알아차린다. 예컨대,(2019)에서 한 쌍을 이루는 두 개의 화면은 마치 펼쳐놓은 고서의 양쪽면처럼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어떤 형상이 빠져나간 것 같은 상상을 부추긴다. 사라짐과 나타남은, 구본아의 그림에서 이렇게 끝없이 반복하는 변증법적 이미지로 공존한다.


   <Wreck scenery 12>(2020)에서는 두 개의 화면이 서로 어긋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두 개의 세계를 연결하듯잔해풍경은 완전한 조형적 관계 안에서 결합되어 있다.특히 폐허가 된 건물 외벽을 모티프로 한 형상 전체 윤곽은 그 안에 구축된 꽃과 나비와 미세한 결정들에 대한 미시적인 시점으로 한없이 수축되었다가 다시 큰 축을 차지하듯 나무가 이루는 거대한 숲의 거시적인 시점으로 우리의 몸을 한껏 밀어내기를 반복하면서 이 시각적 경험에 대한 신체적 수행을 동시에 환기시킨다.죽은 시체처럼 낡고 오래된 건물의 더미인가 싶더니,거대한 숲이자 우주인가 싶고,그러면서도 어떤 미세한 결정들이 극도로 축소된 몸의 감각을 자극한다.나타났다 사라지고,그 안에서 멈추는 이 정중동(靜中動) 기운이 그림 안에 은밀히 내재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림 앞에서 그것을 유희하는 몸의 수행 속에도 함의되어 있는 경험의 실체가 아닐까 싶다.그리고 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알아차림으로서의수행이야말로,우리의 “보기”를 초과하는 미학적 사건의 참된 성과 아니겠는가. 


   <시간의 이빨-좌유(坐遊)>(2019)와 <바람담(屛風)>(2020)은 그러한 연장에서 살필 수 있다. 구본아는 “누워서 유람한다는 뜻으로 집에서 명승이나 고적을 그린 그림을 보며 즐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표준국어대사전 정의)로 “와유(臥遊)”라는 단어를 참조해 “좌유”의 미학적 수행을 시도했다. 그는 1인용 소파의 형태로 편하게 앉을 수 있게 잔해풍경의 이미지로 덮인 의자를 제작했다. 이 <시간의 이빨-좌유>는 그림을 보는 행위에 있어서, 앞서 그가 「‘物(물)’과 나눈 대화”」에서 말했던 것처럼 사물에서 “여러 흔적과 형상들”을 발견하여 “내면에 생성되는 감정의 세계”와의 만남을 강조했듯, 변증법적 이미지로서의 잔해풍경에 깃든 볼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미적 향유와 알아차림에 대한 미적 수행성을 촉구하는 듯하다. 텅 빈 한지 콜라주의 배경만 가져온 <바람담(屛風)>이 <시간의 이빨-좌유>가 가져올 현실에서의 상상적인 것들을 환기시킨다. 구본아는 전시 기간 동안 이 공백으로서의 배경에 잔해풍경을 그려넣기로 했고, 그가 보여주는 수행의 시간들이 배경의 소멸과 형상의 생성을 반복하며 어떤 “멈춤”의 형태로 그림의 시간을 완성해낼 것이다. 


   한가지, 그가 “잔해풍경”을 사유하며 그 형상의 강렬한 물성에 힘입어 보이지 않는 시간들을 눈 앞으로 끌어와 끝없는 미학적 상상과 수행을 가능케 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또 다른 변증법적 구조는 물질과 관념의 합일로서 신체적 경험이 지니게 될 현전의 감각에 대해 새롭게 환기시키는 점이다.

WRECK SCENERY 13 한지 꼴라쥬 위에 먹과 채색, 금분, 은분(Ink and color on korean paper collage,silver and gold powder), 70x60cm, 2020

WRECK SCENERY 14 한지 꼴라쥬 위에 먹과 채색, 금분, 은분(Ink and color on korean paper collage,silver and gold powder), 70x60cm, 2020

작위와 무작위, 시간의 세례와 수묵의 새로운 표정읽기

김 상 철 I 미술평론가, 동덕여자대학교수

시간의 이빨 · TEETH OF TIME 한지 꼴라주 위에 먹과 채색, 금분, 은분((Ink and color on korean paper collage, silver and gold powder), 320x130cm, 2011

주지하듯이 수묵은 대단히 오래된 조형 방식이다. 유구한 역사적 발전과정을 통해 축적된 풍부한 조형경험을 통해 수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정한 체계를 이루었다. 특히 전통시대를 관통하며 그 고유한 심미관은 물론 감상체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들을 포괄하고 있는 수묵의 발전 역사는 바로 동양회화 전통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혹자는 이러한 수묵의 역사성과 이를 통해 축적된 풍부한 조형경험을 들어 수묵은 이미 완성된 형식이라 말하기도 한다. 사실 수묵은 어쩌면 이미 완성된 형식인지도 모른다. 또 그것은 이미 지나가 버린 전통시대의 퇴락한 유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근자에도 역시 적잖은 작가들이 여전히 수묵을 작업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 이는 전통에서 비롯된 타성적 관성일수도 있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전통에 대한 맹종에서 비롯된 집착일 수도 있다. 물론 현대미술이라는 격랑 속에서 수묵의 위상은 이전과 같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묵이 이 시대의 표현 매재로서 존재하고 있을 뿐 아니라, 부단히 새로운 표정과 양태로 변화하며 새로운 시대를 호흡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전통이란 것이 보호되고 전승됨으로써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동력을 수혈함으로써 스스로 생명력을 확보해 나가는 유기체적 성질을 지닌 것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우리는 수묵이 지닌 유장한 기운과 그 저력을 새삼 평가하고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작가 구본아의 작업 역시 수묵을 지지체로 삼고 있다. 어둡고 침잠하는 화면은 다분히 엄숙하고 금욕적이다. 원형으로 이루어진 갖가지 형상들이 어우러져 이루어내는 형상은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이다. 그것은 톱니바퀴나 태엽과 같은 기계적 이미지들이 중첩되며 이루어내는 조형물 같다. 그러나 이들은 기계적인 정연함이나 치밀한 구조의 차가운 질서를 드러내기 보다는 오히려 쇄락하고 무너지는 처연한 상황으로 읽혀진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문명의 폐허처럼 을씨년스러울 뿐 아니라 한없는 침묵의 나락을 연상시킨다. 본래 일정한 에너지를 통해 동작함으로써 본연의 기능을 발휘하고 역할을 수행하던 기계들은 분해되고 해체되어 초라한 속살을 드러내며 그렇게 방치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이요 소멸이다. 기능의 상실은 바로 목적의 소멸을 의미한다. 본래 의미 있고 가치 있던 것들은 이미 망실되고 파기됨으로써 그것은 그저 부호와도 같은 상징으로 남았다. 동력도 목적도 사라져 버린 형해 화된 형상들은 아득한 시간의 저편만을 응시하며 침묵할 따름이다. 기계는 문명의 산물이며, 인간이 행한 작위의 절정이다. 이들을 거둬들이는 것은 바로 시간이다. 인간은 창조하고 자연은 그것을 다시 거둬들여 자연으로 되돌리는 것은 불변의 원칙이다. 시간은 바로 자연이 전하는 부름이다. 시간은 느리지만 결코 서두르지 않고 빠짐없이 자연의 부름을 물질에 아로새겨 놓는다. 그리고는 아득한 망각의 저편으로 인공의 문명과 그 부산물인 물질을 되돌려 다시 자연으로 환원함으로써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확인시킨다. 그것은 “작위하지 않지만, 또 결코 작위하지 않음이 없다.”(無作爲而無不作爲)는 역설적인 말로 표현되는 자연의 법칙이다.


   <시간의 이빨>은 작가가 취한 일련의 명제이다. 그것은 바로 온갖 물질과 현상을 쉼 없이 거둬들이는 자연에 대한 표현일 것이다. ‘이빨’이라는 다소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단어는 바로 이러한 시간이 지니고 있는 속성에 대한 강조의 의미로 읽혀진다. 시간에 의해 할퀴고 뜯겨져 점차 본연의 형상과 기능은 물론 존재와 존엄성까지 해체되어가는 기계들의 파편은 쓸쓸하고 애달픈 감상일 것이다. 이미 무한의 저편으로 사라질 것을 전제로 한 존재이지만, 그 퇴락하고 스러져감에 비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기능함으로써 의미를 갖는 기계의 숙명이자 아픔을 통해 확인하는 인간의 삶에 대한 애잔한 감상이다. 오고 감이 부질없다고 하나 그 어떤 것에서인들 의미 없는 것이 있겠는가? 작가는 이러한 시간의 무덤, 침묵의 시간이 지니고 있는 무서운 현실을 통해 실존을 확인하고 또 절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번 작업에서 채워짐과 비워짐. 그리고 자연과 문명의 순환을 태엽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표현하였다. ‘태엽(胎葉)’, 아이 밸 ‘태’, 이파리 ‘엽’ 의 의미처럼, 시계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만든 나뭇잎과 같이 생명을 잉태시키는 틀을 의미한다... 나는 자연과 문명의 화해에서 오는 경외심을 시간의 이빨의 해답으로 찾았다. 경외심의 아름다움이란 바로 그것이 나이와 함께 자란다는 점이다. 경외심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경외심은 시간에 대한 승리이다.. 그것은 파멸의 반대이다. 그것이 바로 완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작가의 작업일지 중 한 부분이다. 나선형으로 감긴 태엽은 아이를 배듯이 사물에 생명력을 불어 넣어주는 생명의 상징인 셈이다. 그것은 감긴 순간에는 살아있듯 움직이지만, 이내 풀어져 멈추게 되면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인간에게 허용된 것은 바로 감겨진 만큼의 유한한 생명일 것이며, 자연은 그것을 소리 없이 거둬들인다. 있고 없고, 살아있고 죽은 것은 그렇듯 단지 존재하는 양상만 다를 뿐이다. 이를 인정하고 용인하며 수용하는 것을 작가는 ‘경외심’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느티나무의 나이테처럼 더디 자라지만 견고하게 세월의 흔적을 스스로의 몸통에 문양으로 아로 새겨 기록해 낸다. 그것은 정녕 파멸이나 소멸이 아닌 또 다른 삶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작가가 말하는 ‘완성’이라는 것은 어쩌면 이러한 시간의 세례에 순응하며 자신에 속한 유한한 것과 자연에 속한 무한한 부분을 용인하며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아름답다’라고 하는 것이라 읽혀진다.


   진중한 의미와 상징으로 점철된 작가의 화면은 수묵을 통한 침잠하는 듯 한 사변적 구조를 제시하고 있다. 이미 쇄락해 버린 거대한 신전의 장식물처럼, 혹은 문명의 온기가 사라진 폐허와 같은 형상들을 아우르는 작가의 수묵은 이미 전통적인 수묵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선에 의한 조형이라는 원칙적인 방법론에서 벗어나 있을 뿐 아니라 정신적 가치로서의 수묵에 앞서 조형의 매재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그것은 사상성을 전제로 한 수묵의 심미관에서 벗어나 재료와 도구로서의 역할과 기능이 강조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작가의 작업은 다분히 감각적이며 표현적인 요소들로 점철되어 있다. 때로는 수묵이 지니고 있는 물성을 활용하기도 하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이를 묘사의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어떠한 경우든 전통적인 수묵의 운용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행위의 결과가 굳이 탈 전통을 위한 작위적인 몸짓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수묵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린 현대라는 시공에서 획득한 새로운 표정이라 함이 옳을 것이다. 작가의 경우 수묵이 지니고 있는 교조적 덕목에 앞서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의 조형적 목적이 우선하며, 이러한 요구에 충실히 반응한 결과가 표출된 것이라 여겨진다. 수묵의 정신성을 강조할 때, 당연히 수묵 자체에 어떤 정신성이 투영되어 있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운용하는 이의 사유와 결합하여 발현될 때 비로소 정신성을 지니게 됨은 당연한 것이다. 수묵이 현상에 대한 객관의 상황에서 벗어나 그윽한 사변의 세계로 삼라만상을 개괄하고, 번지고 스며드는 물성의 독특함으로 자연을 반영하는 조형 방식이라 할 때, 작가의 수묵은 비록 양태는 달리 하지만 수묵의 근본정신에 충분히 부합하는 바탕을 지니고 있다 여겨진다. 특히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있어 수묵은 단연 가장 민감하게 작용하고 반응하는 조형수단임을 상기할 때, 작가의 작업의지와 매재의 선택은 훌륭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수묵이 현대라는 시공에서 조형이라는 새로운 동력을 흡수함으로써 확보하게 된 새로운 표정일지도 모른다. 수묵은 어쩌면 이러한 과정을 통해 스스로 생명력을 유지하며 아주 오래된 시간의 이야기를 오늘에도 부단히 전해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태엽산수 · SPRING SCENERY 한지 꼴라주 위에 먹과 채색, 금분, 은분((Ink and color on korean paper collage, silver and gold powder), 205x183cm, 2011

시간의 이빨 · TEETH OF TIME 한지 꼴라주 위에 먹과 채색, 금분, 은분((Ink and color on korean paper collage, silver and gold powder), 50x30cm, 2011

태엽산수 · SPRING SCENERY 한지 꼴라주 위에 먹과 채색, 금분, 은분((Ink and color on korean paper collage, silver and gold powder), 110x60cm, 2013

태엽산수 · SPRING SCENERY 한지 꼴라주 위에 먹과 채색, 금분, 은분((Ink and color on korean paper collage, silver and gold powder), 110x60cm, 2013

Reading New Expressions of Behaviors with and without Intention, Baptism of Time and Sumuk (Black and White Painting)

Kim, Sang‐cheol I Art critic

태엽산수 · SPRING SCENERY 한지 꼴라주 위에 먹과 채색, 금분, 은분((Ink and color on korean paper collage, silver and gold powder), 320x130cm, 2011

As you know, Sumuk is very old formative method. It becomes a complete system through abundant formative experiences accumulated through its long history. Especially, its history of development including various contents such as original aesthetic sense and appreciation system of Sumuk penetrating the traditional times is the base of Oriental painting tradition. Some people say that Sumuk is an already completed form because of its abundant experiences accumulated through its history. As a matter of fact, it may be a complete format already. It may an obsolete relic of the traditional times which has already passed. However, not a few artists have taken it as the base of their art works even in modern times. It may out of mannerism from the tradition or obsession over tradition. Of course, the status of Sumuk is not as good as before in the heavy current of modern art. However, it is worthwhile to note that Sumuk still exists as a medium of expression and is breathing a new era changing itself with new expressions and shapes. When remembering that tradition has characteristics of organism to secure its life by getting new energies of new era rather than is maintained by protection and heritance, we need to evaluated and notice its spirit and power of Sumuk again. The works of Gu Bon‐ah are supported by Sumuk. Dark and withdrawn screens are somewhat solemn and ascetic. Figures combined with various circles and round shapes are strange although they are familiar to some extent. They look like forms made of redundant mechanical images such as cogwheels or clockwork. However, they are read as old and falling things rather than mechanical precision or cold order of dense structure. It is dreary just like ruins of a great civilization and reminds us of deep fall of silence. Machines which perform original functions and play roles by performing through certain energies are dissolved and dismantled and left there with their humble flesh shown.


   It is death and disappearance. The loss of function means the destruction of the purpose. What were meaningful and valuable became symbols as they were destroyed and lost. The shapes losing power and purposes are silent staring the other side of the time. Machines are the products of human civilizations and the climax of intentional behaviors of human beings. What takes them back is time. Humans create them and nature returns them. It is the unchanging law. Time is call that the nature delivers. Although it is slow, it inscribes the call of nature on materials without haste. It confirms the relation between humans and nature by returning the artificial civilization and materials which are the products of the civilization to the other side of oblivion. It is the law of nature expressed in an ironic phrase such as “Nothing is intentional but nothing exists without intention.”(無作爲而無不作爲)


   <Teeth of Time> is the series of proportions of the artist. It is the expression for the nature which returns all kinds of materials and phenomena without resting. The vulgar and sensational word of ‘Tooth’ can be read as an emphasis of properties of time. The particles of machines which lost existence and dignity as well as its original shape and function are desolate and sad. Although they are supposed to disappear to the other side of infinity, they cannot help being sad. It is the fate of machines that can exist by their functions and the pity for the lives of people which can be confirmed by pains. Although people say there is nothing important in going and coming, is there really anything without meaning at all? The artist identifies the existence through the dreadful reality that the tomb of time so to speak the silence of time has.


   “In this work, I expressed the filling and emptying and the circulation of nature and civilization through the medium of clockwork. Cogwheel in Chinese characters (胎葉) is made up with ‘胎’ which means pregnancy, and ‘葉’ which means leaves. It means a frame bearing the life just as leaves made to give life to trees... I found the answer of tooth of time as awe from the reconciliation between nature and civilization. The beauty of awe is that it grows with age. Awe needs patience and it is the victory over time.. It is the opposite of destruction. It can be said as completion.”


   It is a part of artist’s journal. The spiral wound clockwork is the symbol of life that gives life to things. It moves as if it were alive when it was wound but it arrives at death when it is fully unwound. What is allowed to human beings is the finite life until being unwound completely. Nature gets it back without puss. Therefore, existence and non‐existence and to be and not to be is the different sides of the same thing. The artist calls it ‘awe’ to approve and accommodate it. Although it is slow just like growth ring of elms, it is inscribed in the body to show the trace of time. It may the beginning of another life rather than destruction or disappearance. ‘Completion’ may mean the allowance and acceptance of infinite parts in the nature and finite part in himself by adapting to the baptism of time. And they are read as beautiful.

   

   The screen of the artist full of serious meanings and symbols present the structure of speculation just as soaring into the screen through Sumuk. Sumuk of the artist combining the shapes just as ornaments of large temple which is already old, or ruins of the civilization which have already lost the warmth of civilization are very much different from traditional Sumuk. They do not follow the principle methodology such as forms by lines and have strong characteristics as media of forms beyond Sumuk as spiritual values. They emphasize the roles and functions as tools escaping from the aesthetic sense of Sumuk assuming ideologies.


   Therefore, works of the artist are full of sensual and expressive elements. They often utilize the material characteristics of Sumuk and sometimes use them as media of description. Either case is far from the traditional operations of Sumuk. But the outputs of these behaviors do not look intentional. They can be interpreted as new expressions acquired in the time and the place of modernity which Sumuk meets during the time of changes. In case of this artist, the formative purpose that the artist wants to express precedes the virtues of doctrine of Sumuk, and the faithful reactions to these requests are shown in the works. When we emphasize the spirituality of Sumuk, it does not mean certain spirituality should be reflected on Sumuk itself. It is natural that it becomes to have spirituality when it is revealed with the combination with the thought of the operator. When Sumuk is the formative methodology to reflect the nature with the uniqueness of properties such as including all things in the world of thinking escaping from the objective situations of phenomena and penetrating and infiltrating, Sumuk of the artist is compatible with the fundamental spirit of Sumuk although the expressions are little different. When we remember that Sumuk is a formative method that acts and reacts sensitively in the relation between human and nature, the selection of the medium and the will of artist becomes in perfect balance. It can be said as a new expression of Sumuk created by absorbing new power and energy such as forms in the time and the place of modernity. Sumuk seems to deliver the story of the old times maintaining its own life through these processes.

태엽산수 · SPRING SCENERY 한지 꼴라주 위에 먹과 채색, 금분, 은분((Ink and color on korean paper collage, silver and gold powder), 80x130cm, 2011

理解「無為而無不為」的新表達方式:時間與水墨的洗禮

※本文刊載於《藝外》雜誌2014年5月號,第120頁~121頁。

文:金相澈 I 藝術評論者

大家都知道水墨是一種相當悠久的創作方式,透過豐富的經驗累積而漸漸形成一種完整的系統,尤其它的發展歷史恆古貫今,包含如原始審美意識與鑑賞系統等許多不同的內容,成為了東方繪畫藝術的磐石。說起來,水墨是一種已經很難再有什麼變革的形式,或者可以說是一種舊時代的陳年產物,不過時下仍然有不少藝術家使用水墨作為他們作品的基底,不管他們是跳脫水墨固有風格,或是執著且著迷於傳統方法。當然,水墨在現當代藝術中並不是主流趨勢,但值得我們注意的是,作為一個仍存在著的表達媒介,它正以一種新時代的形態與表現方式改變著自身。別忘了傳統文化跟有機體有著一樣的特性,它們都能以新的能量改變自己以適應環境,而不是消極地僅以保護或傳承來維持;因此,我們需要重新評估並留意水墨的精神與力量。 


   具本妸的作品以水墨來呈現,深沉且內斂的畫面帶有幾分莊嚴與修行的味道。圖形由許多迥異卻又有些熟悉的圓圈與環狀物結合而成,它們看起來像是如同齒輪與發條般的冗餘機械圖像,但它們似乎並不是精細且井然有序的密集結構,反而更像老舊且崩毀的殘骸,寂靜的就像是曾經擁有偉大文明且讓我們深深沉默的遺跡;原本透過某種動力運轉而各司其職的機械零件,如今展示著它們卑微的軀幹,被拆解且遺忘著。


   機能的失去代表作用被摧毀,機械已然損壞;然而當它們被破壞的剎那就變成了一種有意義與價值的符號。失去作用與動力的外殼正默默地注視時間的另一邊,機械是人類文明的產物,也是人類有意識行為的頂點,而正是時間將它們變回原狀。人類創造了機械,自然恢復了它們,這是不變的真理。時間被稱為自然的傳遞者,它不慌不忙地在物質上刻印出自然的召喚,儘管速度相當緩慢。時間藉由還原人造文明及其產物至被遺忘的那一端,證實了人類與自然之間的關係,我們可以用一句諺語來表示這樣的自然定律:「無為而無不為」。


   《時間的牙齒》是具本妸作品中的其中一個系列,它表示了自然不眠不休地在還原各式各樣的物質與現象,「牙齒」這個通俗且引人注目的詞,可以被解讀為對時間屬性的強調。淒涼且悲傷的機械小零件,既失去了原有外形與功能,同時也失去了尊嚴與存在意義。儘管它們應該消失到了無限的另一邊,它們仍不禁感到悲傷:這是宿命,機械藉由運作而存在著,就像對人類生命的憐憫要藉由苦難才能夠被證實一樣。「即便有人說世上沒有東西是重要的,但是真的沒有任何意義可言嗎?」時間之墓如此沉默地傾訴著,具本妸從這樣令人畏懼的現實裡辨認出存在性。


   “在我的作品裡,「滿」與「空」、「自然」與「文明」的四種循環是通過「齒輪」這個媒介表現的。「齒輪」在韓文裡的漢字是「胎葉」,表示了孕育生命的架構,就好比葉子是被生來提供養份給樹木一樣……我在自然與文明的和諧之中找到了「時間的牙齒」的解答,那就是敬畏。敬畏之美隨時間而累積產生,敬畏需要耐心,而且隨著時間的流動而勝利,它是毀滅的對立面,故可稱之為「完整」。”


   這是藝術家筆記中的一部分。螺旋纏繞的發條是一種賦予生命的象徵,發條在還能轉動時是「活」的,但當它停止轉動時便「死」了,人類所被允許的就是維持有限的生命直到完全停止轉動,因為大自然將它要了回去。然而,存在與不存在、生存與毀滅都是一體的兩面,具本妸稱之為「敬畏」來認同且適應它。雖然就像榆樹的年輪生長一樣緩慢,不過它仍然在其內部刻劃出了時間的軌跡,這可能是另一個生命的開端,而不是毀滅與消逝。「完整」一詞可以表示藝術家在適應了時間的洗禮後,默認且接受了自然的無窮止以及她自己生命的有限,是種很美的形容。


   藝術家藉由水墨以思考架構呈現出嚴謹的意涵與象徵。與一般傳統的水墨十分不同,具本妸的水墨結合了像是古老寺廟裝飾物或像是失落古文明遺跡的外形,它們並不只是遵循著像是線條與強烈特色的媒材形式等原則方法,而是超脫了水墨的精神價值,強調工具般的作用性與功能性,並且從水墨意識形態的審美觀中抽離出來。因此,具本妸的作品充滿了感性與表現性元素,這些作品通常運用了水墨的物質特性,並且有時候用它們來當作敘述的媒介,這些都與傳統的水墨創作有很大的不同。我們可以把這些理解成在現下時空裡,水墨在適應變化的過程中所獲取到的一種新表現方法,而且看起來並不會突兀。


   對具本妸來說,她的目的是想要表現水墨之美,並且將傳達的需求忠實地反應在作品上,然而在我們強調水墨的精神性時,並不表示它們應該被反映在水墨自身,而是自然地展現在與創作者的思維結合上。即使表現方式有些不同,如果水墨是種反映自然特性的方法(包括從客觀現象抽離的思維世界中所有事物),並且深入人心時,藝術家的水墨創作與水墨的基本精神是能兼容並蓄的。倘若我們記住水墨是種在人類與自然之間靈敏地作用與反應的構成方法,創作媒材的選擇以及藝術家的意志便達到完美的平衡。我們可以說,在現代時空中的嶄新能量創造了一種新的水墨表現方式,水墨似乎也藉由這些過程,不但傳達了過往時光的歷史,同時也維持了自身的週期狀態。

시간의 이빨 · TEETH OF TIME 한지 꼴라주 위에 먹과 채색, 금분, 은분((Ink and color on korean paper collage, silver and gold powder), 100x140cm, 2013

태엽산수 · SPRING SCENERY 한지 꼴라주 위에 먹과 채색, 금분, 은분((Ink and color on korean paper collage, silver and gold powder), 100x130cm, 2013

몽환적 기원 

Oniriques origines

알랑 제네띠오 I Alain Génetiot

신몽유도원(新夢遊桃源) 한지 꼴라쥬 위에 먹과 채색(Ink and color on korean paper collage), 100x280.5cm, 2009

신몽유도원(新夢遊桃源) 한지 꼴라쥬 위에 먹과 채색(Ink and color on korean paper collage), 100x280.5cm, 2009

신몽유도원(新夢遊桃源) 한지 꼴라쥬 위에 먹과 채색(Ink and color on korean paper collage), 100x280.5cm, 2009

신몽유도원(新夢遊桃源) 한지 꼴라쥬 위에 먹과 채색(Ink and color on korean paper collage), 100x280.5cm, 2009

신몽유도원(新夢遊桃源) 한지 꼴라쥬 위에 먹과 채색(Ink and color on korean paper collage), 140x100cm, 2009

15세기 조선에서 세종대왕의 아들이 화가 안견에게 자신이 꿈에서 본 산의 웅장한 모습을 그리게 하였다. 3일 만에 완성된 옛 조선의 위대한 작품이 꿈속에서 도교에서 말하는 천국인 도화(桃花) 정원을 거니는 내용을 담은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이다. 6세기가 지난 오늘, 화가 구본아는 유명한 새로운 암산(岩山)을 그리며 이 꿈속을 다시 찾고 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곧 사라질 것을 약속하는 거대한 눈 결정을 보여준다. 한 가지 다른 점은 비상(飛上)할 준비가 되어 있는 나비들이 들러붙어 있는 허물어진 높은 벽에 의해 잘려져 있는 정상으로, 벽 자체가 실제로 한 덩이의 나비떼에 지나지 않는 한, 돌의 무겁고 불변한 특성은 결국 환상일 것이다. 전통적인 동양화 방식에서 볼 때, 곤충이나 깃털의 세밀한 묘사는 이상향을 그린 그림에서 정상적으로 기대되는 장수의 상징 대신으로 사용되면서, 영속성에 대한 기대를 부인하는 가벼움과 일시성의 상징인 나비와 결정(結晶)체를 가지게 된다. 반투명한 나비떼의 자유로운 비상은 초현실적 꿈을 그린 그림과 환상적 구조에 영향을 받은 과거의 그림이 보여주는 몽환적 분위기가 가진 이미 완성되고 고정된 형식을 무너뜨린다. 


   정형화되어 있는 풍경화를 이렇듯 재창조한 것은 화가 구본아가 과거와 연결되는 특징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구본아는 화선지에 그린 수묵화의 전통 기법에 정통하면서도, 세밀한 파란 빛과 연보라빛 터치 위에 과실의 붉은 빛을 대담하게 더하여 모티프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고, 또한 전통을 현재도 생각할 수 있는 실험의 장소로 변모시킨다. 이 같이 현재는 현재가 침입한 과거 속으로 밀려들어가고, 생물과 무생물의 대화 속에서 과거의 유물에 의존하여 새로 창조된다. 특히 암석의 부동성과 식물의 번성간의 긴장은 야생 식물과 무성한 이파리, 그리고 고사리가 고풍스런 생명력 속에서 꽃피우고 다시 태어난 선사시대의 자취를 이야기하는 깨진 화석 조각 속에서 균형을 이룬다. 이러한 조각이 마치 퍼즐 조각처럼 그림 속에 흩어져 있고, 이는 이해하기 힘든 과거를 부활시키고 재구성할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깨진 고대 유물이 모여 만든 선의 특징을 부여 받아 두껍게 조직화된 지붕 위에 쌓여있는 듯 하다. 이것이 바로 예지몽(豫知夢)을 과거에 대한 향수와 접목시킨 화가 구본아의 몽환적 그림이다.


Au XVe siècle en Corée, un des fils du roi Sejong demanda au peintre An Gyeon de représenter le grandiose paysage de montagne qu’il avait vu dans son rêve. Trois jours plus tard était achevé un des chefs d’œuvre de la peinture coréenne ancienne, le Mongyudowondo, Promenade en songe au jardin des pêchers en fleurs, le paradis taoïste. Aujourd’hui, près de six siècles plus tard, Koo Bon-A revisite ce songe fondateur en peignant de nouveau les masses rocheuses du tableau célèbre, mais sur elles apparaissent désormais de grands cristaux de neige, promesse d’une évanescence prochaine. Une autre variation remplace les pics découpés par des murailles en partie écroulées sur lesquelles s’agglutinent des papillons prêts à prendre leur envol, à moins que les murs eux-mêmes ne soient en réalité qu’une masse de papillons, le caractère pesant et immuable de la pierre s’avérant finalement un leurre. À la manière de la peinture orientale traditionnelle le paysage fourmille ainsi de détails minutieusement tracés comme à la plume, mais en lieu et place des symboles de longévité normalement attendus dans ces tableaux utopiques, on a des papillons et des cristaux, signes de légèreté et d’éphémère qui démentent les attentes de pérennité. L’envol libérateur de ces éléments diaphanes déconstruit la forme qu’on croyait précédemment figée et parachève l’atmosphère onirique traduite par le peintre du passé qui entre désormais en résonance avec les tableaux de rêve des surréalistes et leurs architectures fantasmatiques.


   Cette recréation du genre canonique de la peinture de paysage me paraît caractéristique du rapport que Koo Bon-A entretient avec le passé : adepte de la technique classique de la peinture à l’encre sur papier coréen, elle colore ses motifs, d’abord avec de discrètes touches bleues et mauves puis avec des rouges fruités plus hardis, pour leur donner une nouvelle identité et faire ainsi de la tradition le lieu même d’une expérimentation où s’invente le contemporain. L’aujourd’hui pousse ainsi sur les vestiges du passé qu’il envahit et recouvre en s’appuyant sur eux, dans un dialogue du vivant et du minéral. En particulier cette tension entre l’immobilité de la pierre et la luxuriance du végétal s’équilibre dans les fragments de fossiles brisés où les plantes sauvages, herbes folles et fougères disent la trace d’une préhistoire qui affleure et renaît dans toute sa vitalité archaïque. Ces fragments répartis comme les pièces d’un puzzle sur toute la surface du tableau sont alors comme déposés sur une toile dont la texture épaisse lui donne le caractère d’un linge où seraient recueillis des vestiges archéologiques brisés dans l’attente de reconstituer et de faire revivre un passé énigmatique. C’est ainsi que la peinture onirique de Koo Bon-A accorde le rêve prophétique à la mémoire nostalgique du passé.

폐허산수 : 생(生)과 사(死)의 순환 설치

김 미 진 I 홍익대 미술대학원 교수

Physical Object 한지 꼴라쥬 위에 먹과 채색(Ink and color on Korean paper collage), 105x27cm, 2006

Physical Object 한지 꼴라쥬 위에 먹과 채색(Ink and color on Korean paper collage), 50x30cm, 2009

Physical Object 한지 꼴라쥬 위에 먹과 채색(Ink and color on Korean paper collage), 50x30cm, 2009

Physical Object 한지 꼴라쥬 위에 먹과 채색(Ink and color on Korean paper collage), 50x30cm, 2009

구본아는 돌 위에 동양화를 그리는 작업을 통해 자연과 문명속의 사물의 생성과 죽음의 반복적 흔적을 표현한다. 물속에 있는 조약돌과 물위를 비친 자연은 하나가 되고 무수한 세월 과 함께 조금씩 다른 형상을 띄게 된다. 구본아의 <월인천강지곡>은 자갈돌을 캐스팅하고 그 위에 식물이나 나비 같은 연약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그려 넣고 바닥위에 모래를 깔고 마치 물속에서 반영된 자연의 모습을 보여준다. 


   동양화를 전공한 그녀는 종이와 먹, 붓이라는 전통적인 매체의 기본 재료를 사용하면서 다양한 실험을 통해 현대화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자연을 캐스팅한 종이위에 선으로 채집되었거나 화석처럼 보이는 식물을 그린 돌들로 갤러리 안에서 펼쳐낸 상황설치는 조각과 회화, 동양화와 서양화의 새로운 장르를 실험하고 있다. 그리고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에 대해 예술성을 잃지 않은 범위에서의 새로운 소통의 방식을 시도한 것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두를 본질적으로 완전하게 그릴 수 없는 동양화의 관점에서 그녀는 달빛과 강물 그 안의 조약돌 또 그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라는 자연의 질서를 최대한 경험할 수 있도록 서술적으로 설치하여 시적인 시공간을 제공한다. 이 돌들은 본래의 장소를 떠나 건축의 재료가 되고, 인간은 그와 비슷한 질료를 인공적으로 만들어 문명의 세계를 세운다. 


   구본아는 무너지고 폐허가 되어 남아 있는 인공의 구조물에 나비와 풀잎을 그려 넣어 자연과 문명의 대립이 아닌 상생의 관계를 보여준다. 그 모두가 합쳐진 것이 자연이요 세상이라 여긴 것이다. 생과 사의 순환 고리 속에서 자연의 요소는 우리에게 치유의 장이되고 고향이 된다. 최근작 <폐허산수>는 무너진 벽에서 부스러져 나온 돌에 나무, 풀잎, 눈이란 자연의 일상이 들어가 일체가 되어 쌓여 다시 새로운 예술품이란 생명체로 탄생되었다. 평면작업에서 부서진 벽은 수묵으로 무거우면서도 깊이 있게 그려져 근원적인 느낌을 주고, 자연은 채색화로 화려하면서도 가볍게 그려져 덧없이 사라지는 내용으로 순환의 중층적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

Physical Object 한지 꼴라쥬 위에 먹과 채색(Ink and color on Korean paper collage), 70x60cm,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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